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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편집강의/2015

영화편집기초 #4 20150327

4주 편집사 (2)
저번주에 이어 편집의 역사에 대해 다룹니다. 저번시간에 그리피스, 쿨레쇼프, 푸도프킨을 거쳐 현대 편집의 완성까지 이야기했는데 이번에는 현대 편집의 반대편에 있는 이단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반대편의 중심은 에이젠슈타인. 물론 그의 뒤를 잇는 앞줄투사들에 대한 이야기도 섞어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수업에서 많이 언급할 단어는 불균질이 될 것 같습니다. 이유는 지금부터 시작될 수업을 들어보시면 쉽게 알 수 있으실거에요.  자 그러면 강의 시작합니다.



  1. 에이젠슈타인. 위대한 아방가르드

    어떤 사람을 천재라 부를때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4살때 천자문을 떼고 7살이 되어선 시를 짓기 시작하고...’같은 이야기인데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딱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비범한 어린시절을 보냈던 그는 대학교에서 연극과 상관없는 전공을 공부하다 소비에트 혁명으로 학업을 중도에 포기한채 연극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영화관(예술관)에 큰 영향을 끼친 연극 연출가 마이어홀드를 만나게 되죠..

    마이어홀드의 연기론은 유기적 통일성보다는 모든 의미를 다원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천착이었습니다. 에이젠슈타인은 저 방법론을 그대로 영화에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 것들을 구현하는 방법으로 몽타주를 선택하죠. 저번 시간에 언급한 두 감독들과의 차이는 이전의 두 감독은 연결의 관점에서 몽타주를 해석했다면 에이젠슈타인은 충돌의 관점에서 봤다는 사실입니다.

    충돌은 물리학에서 정의하길 두 물체가 서로의 운동에 간섭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두 물체가 서로 힘을 주고받는 현상인데 물체를 쇼트로, 운동을 의미로 바꾸면 쇼트가 서로의 의미에 간섭하는 것으로 해석할수도 있죠. 이 간섭을 강하게 하기 위해 에이젠슈타인은 의미의 연관성이 적은 쇼트들의 결합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기 위해 그가 제일 먼저 한 이야기는 Attraction 입니다. 참고한 책에서는 이를 견인으로 해석했는데 그런 해석은 이해를 방해하기만 할테니 영어를 그대로 사용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굳이 번역을 하자면 구경거리매력같은 단어가 훨씬 잘 어울립니다.


  2. Attraction Montage

    에이젠슈타인이 말한 Attraction은 관객에게 어떤 정서적충격을 주거나 심리적 영향을 미치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공연의 기본 구성단위를 말합니다. 공연의 기본 단위로 해석한 것은 그가 메이어홀드의 영향아래 있었기때문이니 Attraction은 영화의 기본 구성단위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에이젠슈타인은 이 Attraction들을 편집을 통해 충돌 시키는데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둘간에 별 상관이 없는 장면들을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죠. 그 시도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파업>의 도살장면과 파업진압장면간의 교차편집입니다. 후에 <지옥의 묵시록>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차용된 그 편집은 상관없어 보이는 두가지 요소들을 결합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합니다.

    소를 도살한다는 것은 무슨의미를 지닐까요. 소에 감정이입을 한다면 소의 불안과 공포가 느껴질수도 있고 살아있는 생명체가 죽는 장면이니 죽음이 연상될 수도 있고 도살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니 죽음이 살해로 의미가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 자체로 다양하게 의미를 연상할수 있는 장면이 파업진압장면과 결합하며 소가 시민으로 연결되고 도살자는 진압군으로 연결되면서 파업장면의 잔인함을 더욱 강화해서 표현한다는 거죠. 이게 에이젠슈타인이 말한 충돌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가서 그가 말한 충돌을 아주 잘 재현한 영화의 구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알렝 레네의 <히로시마 내사랑>의 도입부에는 엉켜있는 나체 남녀와 히로시마에 대한 뉴스릴, 풍경 인서트들이 뒤섞입니다. 자 나체 남녀와 뉴스릴는 어떤 연관관계가 있어보이나요?


    한번도 자지 않고 끝까지 보지 못했던 <히로시마 내사랑>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중 하나입니다. 볼때마다 졸음이 오지만 그때마다 느껴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연민의 감정이 저에게 깊은 감동을 줘서인데 제가 느끼는 그 감정에 강한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이 상관없는 내용간의 연결에서 출발하는게 아닌가 합니다. 원폭으로 인한 상처의 흔적과 두 남녀의 모습을 계속 교차하며 어느 순간 이 두 남녀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와 현실의 상처가 서로 연결되기 시작하는거죠. 이 사실은 <히로시마 내사랑>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유기적 연결관계가 약한 것들끼리 연결하면서, 어쩌면 상관없는 것들이 물리적으로 연결되었기에 그 장면들간의 연관성을 찾는 지각작용에 의해 둘간의 의미가 연결되기 시작하며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능동성이 지루함을 발생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방식을 통해 얻어내는 의미의 확장은 우리가 간과할것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옆에 보시는 타로 이미지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누군가는 현명한 선지자를 느낄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불길한 노인을 느낄수도 있습니다. 이런 연상되는 의미의 다양함이 타로카드로 보는 점술의 핵심이기도 한데 이는 정확히 저 그림이 무슨 의미를 지니느냐라는 것보다 대충 어떤 느낌들이 도출되는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일테고, 어쩌면 그 것이 이미지를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일런지도 모릅니다. (어떤 느낌이 도출되냐가 중요한 이유는 별개 있나요. 사람의 모든것을 포함하는 점을 쳐야 정답처럼 보이는 선문답을 시작할 수 있는 거거든요.)

    자 여기까지 이야기하니 에이젠슈타인이 말한 Attraction이 무엇인가에 대해 신호가 오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Attraction이란 사실 별다른게 아닌 에이젠슈타인의 마음에 쏙드는 쇼트를 의미합니다. 쇼트는 다음주와 다다음주에 더 자세하게 다룰텐데 그때 다루는 내용이 쇼트를 어떻게 해석할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 해석의 방법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감이 오셨길 바라고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으로 우선 미뤄두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에이젠슈타인은 최종 도출될 결과물을 미리 예측하고 그 결과를 강화할 수 있는 자극들의 배치가 이 충돌에 핵심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극에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웠을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연상하는 것도 좋을거 같네요. 자극에 반응하는 것을 연구한 후에 그 자극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해 사용하면서 도출되는 결과를 예측해보는 것이죠.

    개에게 먹을 것을 줄때마다 벨을 울리면 벨을 울릴때 알아서 먹을 준비를 하며 침을 흘린다는 사실을 영화로 바꿔보면 대충 이런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무서울 것으로 예상되는 장면을 계속 보여주면서 아무 무서운 내용을 배치하지 않으면 관객은 이 장면이 무섭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때 무서운 장면을 집어넣는다면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기에 훨씬 더 큰 효과를 얻어낼 수 있겠죠. 에이젠슈타인은 Attraction에 대한 반응을 이 실험처럼 감독이 통제하고 활용하는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여기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는 두편의 영화, <할복>과 <콘스탄트 가드너>가 있습니다. 이 두 편의 영화에는 모두 잔인한 장면이 존재합니다. <할복>은 나무칼로 자신의 배를 짓이기듯 가르는 남자의 배, <콘스탄트 가드너>는 죽어 타버린 부인의 얼굴이  그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이 하나 생깁니다. <할복>에선 정확히 배를 찌르는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지만 <콘스탄트 가드너>는 팔과 발같은 부분의 화상흔적은 보여주지만 얼굴은 편집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할복>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상처의 잔상을 계속 남기기 위해 상처의 흔적을 길게 정확히 보여주는 반면 <콘스탄트 가드너>는 부인에 대한 감정을 다원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부인의 죽은 얼굴은 편집으로 삭제해버립니다. 이 경우 부인의 얼굴이 보였을때와 보이지 않았을때 정서에 간극은 존재하죠. 에이젠슈타인은 이런 자극의 차이로 인해 도출되는 의미의 차이를 사전에 감독이 예측해 영화를 편집해야한다고 말했던 것이죠. 이 배치를 통해 영화의 수위, 내용, 감정들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여기에 더해 에이젠슈타인은 이 Attraction들의 자극을 더욱 강화시키려면 노골적인 대위법을 사용하라고 합니다. 대위법에 대한 지식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닥 필요없습니다. 고등학교 수능, 국어과목에 많이 나올법한 수준의 지문 이해력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상관없는 선율을 조화롭게 배치시키는걸 대위법이라 부르는데 이 조화앞에 노골적인 이란 수식어가 붙어있는 만큼 과격한 배치를 에이젠슈타인은 원했고 그 것이 영화의 표현영역을 넓혀준다 이야기합니다.

    이런 방법은 이미지끼리의 조합에서도 나타나지만 우리가 가장 편하게 사용하는 방식은 영상과 소리의 노골적인 대위법이죠. 예를들면 <릴리슈슈의 모든 것>의 다음과 같은 장면이 같은 겁니다.

    이 장면에 흐르는 음악은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Arabesque>. 당장에 유튜브만 검색해도 수없이 쏟아지는 이 피아노곡은 드뷔시의 <clair de lune>과 더불어 영화음악으로도 엄청나게 많이 사용되었는데 주로 이 곡이 가지는 서정적인 멜로디를 이용해 영상이 가지는 서정성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곡이 삽입되었습니다. 그런데 <릴리슈슈슈의 모든 것>의 문제의 장면은 정 반대의 장면에 이 음악을 사용합니다. 쿠노에 대한 집단강간장면에서 감독은 일부러 이 서정적인 음악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협박에 못이겨 쿠노를 이 폐공장까지 데려온 유이치를 담아내는 방법은 극단적인 접사. 거기에 영화내내 빛은 아름답게 화면을 드나들기까지 합니다.

    자, 이 서로 조화롭지 않은 두가지 요소가 결합된 장면을 보면 무엇이 느껴지시나요? 서로 튄다거나 어색한 느낌이 들기보다는 인물들의 고통이 훨씬 커지는 효과를 일으키지 않나요? 고통스러운 장면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이런 비일치의 원리는 여러분 영화의 깊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여기서 더 극단으로 나가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도 있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통해 선을 넘지 않는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죠. 매번 이야기하지만 둘간의 좋고 나쁘고의 차이는 없는 것이니 여러분들은 그저 자신의 방법이 최대치를 낼 수 있을지 없을지만 고민하면 될 거 같습니다.





  3. 충돌몽타주

    에이젠슈타인은 어떻게 영화의 자극을 올리느냐에 집중했으니 에이젠슈타인의 편집방법은 앞서 이야기한 노골적인 대위법같이 어떻게 충돌 에너지를 크게할 것인가에 대해 집중했습니다. 앞서 연극으로 마이어홀드밑에서 작업을 시작했던 이야기를 했었는데 에이젠슈타인은 이런 경험덕분인지 많은 동양극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가부키나 노(일본), 경극(중국)같은 것들을 말이죠. 뭐 이런 이야기가 중요한건 아니고 이 덕분에 동양문화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소견이 있어서인지 이런 말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중국 한자를 예로 들며 상형문자라는 것은 이미지의 연상적 사고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건 한문 수업을 들어보셨던 분이라면 중국 한문이 몇가지 제자원리로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하면 대략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물체의 형상을 따서 만든 상형문자에 이 것들이 섞어져 회의문자를 만든다거나 소리와 내용이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형성문자라든가 하는 것들을 말이죠. 역시나 이런 이야기도 에이젠슈타인이 동양극을 좋아했던 것만큼이나 별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긴 하지만 이런 것들을 보며 자신의 생각이 보편적을 타당할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에 자신을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자가 몽타주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방식은 인류역사의 오랜 사고방식으로 잡혀있을 것이란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그 사실을 토대로 에이젠슈타인은 개별적인 쇼트의 배열은 합이 아닌 창조라고 주장합니다.

    이 창조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이야기 하기 위해 두가지 몽타주를 비교합니다. 바로 미국식 몽타주(양적인 누적)와 소비에트식 몽타주(질적인 비약)을요. 미국식 몽타주는 저번시간에 이야기했던 쿨레쇼프 + 푸도프킨의 이야기와 동일하며 소비에트 몽타주는 에이젠슈타인이 내새운 충돌 몽타주에 기반한 편집방법을 말합니다. 둘간의 차이에 대해 에이젠슈타인은 특정쇼트에 대한 해석과 접근방법의 차이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미국에서 클로즈업이란 인물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소비에트의 클로즈업은 인물을 크게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고 말이죠. 같은 말처럼 보이는 이런 말장난에 왜 장단을 맞추고 해석해야하냐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 내용은 꽤 중요한 부분입니다. 선언적 의미로 봐도 그렇고 이 선언이 이후에 영화를 발전시켜나가는 긍정적인 요소를 봐서도 말이죠.

    에이젠슈타인은 단순히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의미를 부여하는 위치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그 위치에 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영화가 단순히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넘어선 해석된 의미를 전달하는 단계로까지 갈 수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 그가 하려고 한 것은 바로 시각적 충돌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것간의 결합, 그리고 그 시각적 충돌의 가장 좋은 예는 바로 점프컷입니다. 세세하게 들어가면 그 차이가 꽤 벌어져 보일수도 있겠으나 에이젠슈타인의 영화에서부터 초기형태의 점프컷은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이가 밟히는 것을 보며 절규하는 부인의 모습에서도 동작의 연결에 집중하기 보다는 강렬한 이미지의 병치에 집중하고 있으며 유명한 오뎃사 함포사격후의 사자가 일어서는 장면 같은 경우에도 불연속적인

    이미지를 집적적인 연관관계가 없는 상황에 삽임함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 이런 재미없는 영화사시간에나 언급할법한 이야기를 굳이 여기서 또 하는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 에이젠슈타인의 주장과 그 것을 통한 표현이 현재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강렬한 감정표현을 하기 위해 동작연결을 무시한채 강한 감정 몇개를 붙여나가는 편집은 지금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편집방법인데 그 시작은 가까운 시절이 아닌 영화가 시작된지 얼마 안되던 때부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물론 저 방식을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방식은 그 시절과 지금간의 간극이 존재하기는 할테지만 말이죠.

    거기에 사자동상이 일어서는 3개의 쇼트도 다양한 방식으로 현재 영화의 표현양식에 들어와 있는데 나타나는 방식은 두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동작을 정지시켜 그 지연된 시간에서 나오는 강렬한 이미지의 누적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인물의 내면을 다루거나 과거와 현재를 오갈때 인터컷의 개념으로 활용되는 방식들이 있습니다.


    시드니 루멧의 <전당포>에서는 반복적으로 인터컷이 제시가 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인터컷들은 그 등장이유가 명확하지않아 왜 등장하는지에 대해 관객으로 하여금 의문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의문이 풀리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그 의문의 결과가 낳는 비극이 극적긴장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내죠. 상관없어 보이는 이미지를 영화 사이에 집어넣는 인터컷은 왜 이런 자극을 주는가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의문에 대해 너무 어렵지 않은 수준에서 불편함을 서서히 해소시켜나가주면 의문과 해소간의 연결이 생기며 영화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을 전달하기에 매우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가 있습니다.


    굳이 인터컷이 아니더라도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편집은 영화의 의미를 더욱 확장시킬수가 있는데 이 것과 관련도어서는 다음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죽은시간에 관해서 말이죠.

    에이젠슈타인은 이 충돌몽타주를 통해, 그러니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몽타주 조각들의 조합을 통해 더 넓은 의미로 나가는 것을 연상몽타주라 명명하며 이 연상몽타주는 기초적인 몽타주에서부터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차원의 몽타주까지 폭넓게 사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기초적인 차원부터 더 높은 차원까지의 몽타주를 한 시퀀스 안에 잘 정리해놓은 좋은 예는 <콘스탄트 가드너>테사의 기억을 찾아 암스테르담으로 떠나는 저스틴 시퀀스에서 아주 잘 표현 되고 있습니다.

    <콘스탄트 가드너> https://www.youtube.com/watch?v=2T8F0ytQAA4

    방향성이 서로 다른 쇼트를 충돌시켜 현재 상황이 주는 급박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저스틴 주위에서 감시의 이미지를 가지는 쇼트들을 긴장한 저스틴의 얼굴과 몽타주하면서 쫓기고 있는 저스틴의 감정, 현재 상황들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에이젠슈타인의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한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형식과 내용간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죠.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때로는 내용보다 형식이 우위에서서 형식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내용이란게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물음이 말이죠. 아마 그 의문은 에이젠슈타인이 계속해 고집한 급진적인 몽타주와도 어느정도는 연결이 되는 이야기일거 같습니다. 에이젠슈타인은 그 표현방식을 몽타주에서 찾았을뿐 꼭 몽타주가 아니더라도 형식이란게 때로는 내용을 만들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죠.

    미망인 복장을 한 여인이 무덤가에서 울고 있었다. “진정하십시오, 부인.” 동정하는 한 낯선 사나이가 말을 하였다.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한 것입니다. 당신의 남편말고도 어딘가 당신을 계속 행복하게 해줄 남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랬죠.” 여인은 흐느끼며 말했다. “그랬어요. 하지만 이 무덤이 바로 그 사람이 누워있는 곳이랍니다. - <위로할 길 없는 미망인中>

    에이젠슈타인도 언급한 위 구절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 연상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오는 방식과 경험에 따라 해석이 가능한 것일뿐 그게 진실일지 아닐지는 모른다는 사실일테고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는 보여주는 이미지를 조작해 우리가 실재와는 다른 우리가 원하는 효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말이죠. 왜냐면 모든 이미지는 연상을 통한 해석을 통해 우리가 이해하는 것일테니까요. 여기서부터 에이젠슈타인의 궁극적인 야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에이젠슈타인의 이러한 야망은 현재를 통해 과거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도출해낸 것이기에 그의 진의와는 어긋나있을수는 있지만 그의 야망과 비슷한 과정을 겪어간 수많은 감독들의 영화들을 보면 그 것이 그리 많이 어긋나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야망은 내용을 넘어서는 형식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 것은 지적영화에서도 발현되지만 이 것은 어쩌면 세상 모든 감독들의 궁극적인 욕망중하나이지 않을까도 싶거든요.


  4. 지적영화
    수많은 감독들의 망하는 지름길중 하나는 이미지의 강화, 이야기의 약화라는 루틴입니다. 그 경로는 에이젠슈타인이 지적영화라는 말을 통해 제대로 설명해줍니다. 아, 이 것이 에이젠슈타인을 망하게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하려는 것은 망하냐 망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이 유혹의 달콤함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지적영화란 쉽게 말하자면 이야기의 약화, 그러니까 스토리나 만들어진 플롯에 의지하지 않고 만들어진 이미지를 구성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직접 표현하는걸 말합니다. 과잉된 표현의 끝을 달린 에이젠슈타인이었으니 충분히 이런말을 할법한데 에이젠슈타인은 지적영화를 이야기하며 이런 언급을 합니다.

    ”진리는 머리로만 이해될 수 없고 감각적으로 함께 느껴야 효과적이다.”

    영화를 연출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영화가 소설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에이젠슈타인의 지적영화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영화라는게 소설의 한줄, 시나리오의 지문을 그냥 그대로 찍어만 낸다고 그 것이 진리에 다다르는 것이 아닌 감각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내야만 진리로 다가설수 있다라고 말이죠. 우리가 시나리오의 장면들을 영화로 옮길때에 그 장면을 찍고 대사를 구사한다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장면을 제대로 표현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촬영하고 어울리는 방식으로 조합해야한다는는 말이기도 하죠. 간단히 말하면 스토리가 중요하지만 그 것을 어떻게 표현하냐는 것도 아주 중요하단 뜻으로 이해해도 될듯합니다.

    이런부분이 주로 나타나는 것들은 스타니슬랍스키 방식으로는 이해되지 못하지만 영화적으로는 말이 되는 부분들입니다. 인위적인 쇼트의 배열과 의도가 강한 쇼트들을 사용해 내적으로 이해되지 못할 부분들을 어떤 고고한 장강의 물결같은 흐름에 살포시 흘려 이야기를 흘려보낼수가 있다는 거죠.


자 이렇게 에이젠슈타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마쳤습니다. 실제 수업시간에는 기술의 발전사까지 다뤘지만 강의록도 늦게 올라오기도 했고 그 이야기가 실제 영화를 만드는 것에 큰 의미가 있어보이진 않으니 살포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덤으로 이 외의 에이젠슈타인에 대한 부분은 영화이론시간에 배우실 것들을 추천합니다. 이 뒤로는 굉장히 사변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어서 지금의 우리와 대화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했던말을 동어반복하는 느낌까지 있고 말이죠. 어쨌든, 이어 우리가 다음주부터 해야할 내용들은 자극에 관한 것들입니다. 영화의 기본단위이며 자극이 시작되는 지점, 즉 쇼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쇼트란 것은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에이젠슈타인이 말한 Attraction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주로 에이젠슈타인의 관점에서 부터 진행되는 쇼트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자 그러면 다음주에 만나뵙도록 하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혹여 생략되거나 잘못된 내용들은 다음 강의록에서 수정 및 정리한 내용을 먼저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더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의한지가 너무 오래되어 다시 강의록 쓰기가 많이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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